일상의 고독 스민 회색 방, 성지연

일상의 고독 스민 회색 방, 성지연
월간사진, Vol.491, Dec, 2008


검소한 색과 절제된 구성, 일상의 단편전인 이야기가 특징인 성지연의 사진 «일상의 방 (Chambre ordinaire, 2005-2008)»은 얼핏 18세기 네덜란드 화가의 소박한 인물화를 연상시킨다. 성지연은 마치 유리로 사면이 막힌 듯한 투명한 밀실 안에 다양한 인간군상을 집어 넣고 멀찍이 그들의 고독한 일상을 관찰했다. « 일상의 방 »에는 내레이션이 부재한다. 중성적인 공간과 최소한의 연출은 사진 속 인물의 정체와 행위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곳에는 보는 사람들이 상상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이끄는 작은 이야기 거리 (마이크로 내레이션)가 있다. 그리고 관람자들은 일상에 몰두하는 사진 속 인물들의 소리 없는 독백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프랑스에서 10년째 사진작업을 해오고 있는 성지연은 지난 11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 세계 속의 한국현대미술-파리 »전에 참여했다. 성지연은 전작인 현대사회의 편리성 (Confort Moderne, 2003-2005)에서 자동화된 현대사회의 공간과 시설을 비추었다. 서울과 파리 같은 대도시의 시설들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모두 자동화되었지만, 오히려 그러한 편리함이 인간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기도 했다. 서울과 달리 비교적 현대성과 근대성이 함께 섞여있는 파리조차 이는 마찬가지였다. «요즘은 지하철 표를 살 때도 표를 달라는 말 대신 기계의 버튼을 누르고, 커피를 마시거나 사진을 찍을 때도 자판기나 자동인화기를 이용하죠. 현대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더욱더 단절되고 있어요.» 그는 사람들이 없는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파리의 공공장소들을 마치 외롭게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처럼 촬영했다. 사람이 부재하는 지하철 플랫폼과 덩그러니 남겨진 의자, 에스컬레이터, 사무실의 집기 등은 어쩐지 낯설고 고독하며 사람이 붐빌 때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성을 드러낸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상의 고독

텅 빈 시설과의 교감은 성지연에게 심한 고립감을 느끼게 했다. 사람이 목마르게 그리워진 그는 사물이 아닌 사람들 속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찾기 위해 인물사진 작업인 «일상의 방»을 새롭게 시작한다. «평생 살을 맞대고 산 부부도, 자식과 부모 사이에도 서로 속마음은 모르잖아요. 과연 상대방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또 그 사람을 얼마나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저에겐 굉장한 폭력으로 다가왔어요. 어차피 상대를 다 알지 못한다면 그저 모델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모델과 나 사이의 경계선에서 촬영하기로 했죠.» 그래서 그의 작품 속 모델은 인물 고유의 성격이나 정체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는 모델의 내부도 외부도 아닌 경계지점에서 관찰하고 행동을 지시하고 촬영할 뿐이다. «장 뤽 고다르 감독의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2 ou 3 Choses que je sais d’elle) 이란 영화 제목이 제 작업을 대변할 수 있을 듯 해요.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인간의 고독함을 가족이나 남녀의 관계로 표현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들에서도 영향을 받았어요. 영화의 미니멀리즘과 고요함, 거리감 등이 그것이었어요.» 그는 약 10년간 프랑스에서 생활했지만 가족을 이뤄 뿌리내린 정착민은 아니다. 프랑스인도 한국인도 아닌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홀로 주변을 관찰하고 생각할 기회가 많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고독이란 주제에 몰입하게 되었다. 일상의 방 속 인물들은 고독하다. 하지만 사진 속에서 인물을 고독하게 만드는 특별한 사건이나 이야기 없이 그저 매일 반복되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의 어느 한 단면만이 있을 뿐이다. « 보편적인 일상 속에 자리 잡은 고독한 시간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제가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가 없었던 것처럼 고독함 역시 특별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죠 » 그는 보편적인 고독함을 표현하기 위해 철저히 중립적인 장소와 시간, 모델을 선정했다. 만약 자신과 닮은 동양인을 모델로 쓸 경우 보는 사람들은 인생의 보편적인 고독함 대신 작가의 전기를 참고해 타지에서 온 이방인의 고독을 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왜 한국인 모델을 안 찍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한국인이라는 특수한 모델은 보는 이들이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남기죠. 저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편견을 줄 수 있는 상황이나 모델은 피했어요. 누구나 경험하고 누구나 지각할 수 있는 고독을 표현하고 싶었죠.» 그가 말하는 고독은 부정적인 의미의 소외가 아니라 인간살이에 필수불가결한 거리감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모델들과 저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리감을 느낀 것처럼 고독한 순간은 상대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공간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알아가는 탐구과정이에요.»

관람객의 입장에 선 몰입과 응시

성지연은 처음에는 모델의 생활공간을 직접 찾아가 촬영했다. 모델은 대부분 친구와 이웃 등 지인들이었지만 외양과 태도가 흥미로울 경우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도 촬영을 요청했다. «모델을 찾고 나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상을 살아가는지 궁금해서 그들의 집을 찾았죠. 하지만 파리의 집들은 대부분 아주 작고 복잡해요. 결국 배경을 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는 스튜디오로 옮겨왔죠:»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첫 모델인 피에르의 사진을 계기로 일상의 방 작업을 시작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같은 사진과 친구인 피에르를 제 스튜디오로 데려왔어요. 당시 연애로 힘들어한데다 몹시 추워서인지 그 친구의 분위기는 매우 음울했죠: 의자를 스튜디오 한 가운데로 가져다 놓고 그에게 외투를 입은 채로 편히 앉아 쉬라고 주문했어요. 그곳에 앉아 졸거나 생각하는 친구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비에 젖어 떨고 있는 새처럼 보이더군요. 그래서 새의 이미지에 가까워질 때가지 손과 다리의 포즈를 설명하며 마치 지점토처럼 그의 몸을 움직였어요. 그리고 자기 생각에 몰두하기 시작한 순간 그의 모습을 찍었죠. 피에르를 찍은 첫 사진은 제게 매우 중요한 사진입니다. 제가 찾던 이미지가 이 사진 한 장에 모두 들어가 있거든요.» 그의 첫 번째 사진은 단순하고 추상화된 공간, 모노톤으로 구성된 최소한의 색감, 절제된 포즈, 일상 속 인물의 몰입이 보여주는 고독 등 일상의 방 시리즈를 이루는 모든 조건들의 모태가 되었다. 일상의 방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프레임 밖의 공간을 응시하고 있다. 관람객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모델들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몰입해 있고, 그 행위를 바라보는 관람객들도 모델의 시선에 방해 받지 않은 채 사진에 몰입할 수 있다. «사진이 가지는 연극성을 최대한 배제하려 했어요. 연극의 소격 효과는 몰입을 방해하지만 그림이나 사진과 같은 평면 작업에서는 몰입이 가능해요. 그 방법 중 하나가 관객과의 시선 돌리기죠. 관람객의 입장에서 사진을 바라보고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조건은 찾아가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껴요.» 그래서 그는 거리를 두고 촬영하는 등 최대한 모델이 자신의 역할이나 관찰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그 상황만 몰입하도록 배려한다. 사진 밖을 내다보는 인물의 시선은 사진 밖 공간에 대한 관람객의 상상을 자극하고 공간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시간이 부재하는 중성적인 방

회색의 공간과 사물의 절제된 배치는 모두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다. «색깔은 많은 해석과 이야기를 만들어요. 인물의 행위와 사건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색감자체에서 오는 구도와 재미가 먼저 눈에 들어오죠. 주제를 보다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색에 의해 생겨날 수 있는 수많은 상상과 이야기들을 빼려 했어요. 그러기 위해선 최소한의 색감과 단순한 구성이 필요했죠.» 그는 배경과 사물 뿐 아니라 모델의 의상과 피부색, 심지어 머리카락 색도 전체적인 색감에 맞게 연출하고 준비했다. 밀랍인형처럼 창백한 모델들과 정 방향의 구도, 일상적인 소재와 조명의 느낌들은 18세기 프랑스 정물화가인 샤르뎅의 인물화와 휘슬러가 자신의 어머니를 그린 잿빛 그림을 연상시킨다. «제 작업은 사진가보다는 화가의 입장에 가까워요. 모든 상황을 연출하고 오랜 시간 조형요소들을 하나씩 없애며 단순화하는 과정이 닮았죠.» 최소한의 색감과 단순한 구성은 사진 속 인물의 정체성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개념마저도 희석해버린다.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 일인지 알 수 있는 단서는 사진 속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멈춘 듯 보이지마 영원히 흐를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제 작업에는 앞뒤 정황은 상상에 맡길 뿐 순차적인 줄거리를 가진 내러티브가 없어요. 그것이 바로 일상이 아닐까요 ? 일상은 사소하고 하찮은 상황이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요. 일상의 방은 나이와 직업, 성격을 알 수 없는 보편적인 인물과 그들의 습관적인 행위를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보는 셀프 포트레이트이기도 해요. 그래서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인생의 한 부분을 비춰보는 것 같다고 말해주세요.» 그가 주변을 관찰하고 쓴 짤막한 글들은 작업의 시나리오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 내용은 기승전결을 갖춘 사건이 아닌 일상의 어느 한 토막일 뿐이다. 어항과 소녀에서는 물고기가 없는 빈 어항과 고양이를 닮은 소녀, 마치 사라진 물고기를 손에 쥔 듯한 포즈를 통해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빈 화병과 여인 에서는 사랑이 떠나고 난 후 남자에게 받은 마지막 꽃마저 시들어 버리고 나서 빈 화병을 바라보는 여인의 감정을 묘사했다. 오브제는 단순한 회색의 배경에서 시각적인 단편을 쓰기 위한 유일한 미장센이자 이야기의 상징물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갈수록 점차 현실적이고 자유로운 형식을 갖추기 시작한다. 인물들의 창백한 얼굴에 온기가 돌고 사물들도 사실적인 색을 찾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하나에서 둘로 늘고 사진의 포맷과 구성도 보다 자유로워졌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변함없어요. 하지마 인간과 인간 사이에 필요한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거리감을 보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졌죠. 이전 작업에선 모델과 작가(관람객)의 관계가 전부였다면 새 작업에서는 사진 속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하나 더 형성돼요. 연인이나 부부 사이인 두 명의 인물이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것처럼 가장 친밀한 관계조차 충분한 거리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추상적이고 단순한 성지연의 사진은 문학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며 무궁무진한 시나리오를 유발한다. 그는 그저 두세 가지 단서를 던져주며 해석을 관람객에게 맡길 뿐이다. «한 갤러리스트는 제 사진을 보고 너무 시끄럽다고 표현했어요. 그의 역설적인 표현은 제가 의도한 바와 정확히 일치해요. 침묵하는 상황이지만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는 보이지 않는 언어들의 웅성거림을 상상한 것이죠.»그의 다음 작업은 언어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인생살이에 대한 고민을 의사소통의 대표적인 수단인 언어가 만드는 갖가지 상황들로 풀어낼 생각이다.